서해안
아이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고, 안개가 자욱해서 어디가 바다인지 눈 씻고 찾아보려 해도, 갈매기들만 희뿌연 안개 사이로 끼루룩거리며 제멋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뿐. 갈매기 울음소리와 비릿한 해초 냄새와 철렁대는 파도 소리를 확인하며 안개가 걷힐 때까지 이정표를 따라 주행하는 사이, 천리포 해수욕장에 다다르고, 해는 떠오르고, 안개도 살살 걷히고, 아이들도 깨어납니다.
"와! 바다다! 여기 맛조개 있어요?", "저기 상어도 있쩌! 어! 미역! 미역!" 눈이 띈 아이들이 입도 함께 깨어 쩌렁쩌렁 떠드는 틈을 타 마침내, 안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6월의 이른 아침, 바다는 온전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부드러운 해안선을 따라 양옆으로 옹기종기 정겹게 모여 있는 갯바위들, 소나무 숲, 멀리 고깃배까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침 햇살이 녹아내린 따뜻한 푸른 물이 보입니다.
벌써 몸이 들썩대는 아이들을 돗자리에 눌러 앉히고, 서둘러 아침밥을 먹습니다. 밥솥에 남아 있던 밥 다 퍼서 도시락에 꽉꽉 눌러담고, 냉장고에 있던 밑반찬 전부 빈 플라스틱 그릇에 담아 오니, 그게 보기보다는 참 맛있더군요. 김치, 콩나물 무침, 멸치 볶음을 밥과 함께 김에 싸서 먹으니 애어른 할 것 없이 쩝쩝 잘 먹는군요. 꿀맛이 따로 없습니다. 이렇게 처음 아침 바닷가에서 밥을 먹는 아이들 눈망울엔 설렘과 호기심이 반짝거리고, 오늘의 목표인 맛조개잡이에 슬슬 발동이 걸리는군요.
맛조개 잡으러
서해안 갯벌이 깨끗하고 맛조개가 많이 산다는 것을 그 무렵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고 처음 알았답니다. 애 아빠도 저도 워낙 도시 촌놈들이라 자연 경험이 부족했고, 아이들에게도 마음껏 뛰놀고 구를 수 있는 곳이 꼭 필요하다 생각했는데, 갯벌만큼 좋은 곳이 없겠구나 싶어 이것저것 찾아보고 조개잡이 준비도 나름 착실히 해보았지요. 알고 보니, 서해안은 세계 5대 갯벌의 하나로 손꼽히는 황금 어장이더라고요. 한 달 중, 밀물과 썰물의 차가 제일 큰 사리 날, 갯벌에서 조개가 잘 잡힌다는 정보를 읽고, 우리 가족은 과감하게 맛조개잡이에 나섰습니다.
오전 9시쯤부터 바닷물이 빠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호미 들고 들통 들고 조개 잡으러 나온 가족들, 연인들, 어린이들로 넓은 갯벌 안에는 촘촘하게 사람 꽃이 핍니다. 우리만 온 게 아니로구나 반갑기도 하고 머쓱하기도 한 기분으로 신발과 양말을 쪼르르 벗어두고 맨발로 갯벌을 딛어봅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머뭇머뭇 엄지발가락으로 내딛다가, 갯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단단하다는 것을 느낀 아이들이 먼저 달리기 시작합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바닷바람을 한껏 맞으며, 오늘만큼은 찌든 일상을 던져두고 사람들을 따라, 물 빠진 길을 따라 멀리, 저 멀리...
비단 갯벌
갯벌은 정말 부드럽습니다. 발이 빠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올록볼록 결이 있어 발바닥 지압 효과가 느껴지는군요. 갯벌 하면 질퍽거리는 진흙탕을 떠올렸는데, 발에 잘 묻지도 않고 발가락을 파고드는 촉감이 그저 고운 담요 위를 걷는 것만 같습니다. 바닷물이 한바탕 빠져나간 갯벌의 알몸뚱이 위에는, 여기저기 생명이 숨 쉬는 자리가 드러납니다. 뽕뽕 구멍이 뚫린 자리에 무수한 갯생물들의 호흡질이 물방울 차올라오고, 엄지손톱 크기의 게들이 부지런히 구멍을 넘나들며, 땅 위에다 동글동글 모래집을 쌓아 올립니다.
갯벌이 드러나니 살판나는 건 사람만이 아니군요. 하늘을 빙빙 날다가 어느 틈에 쏜살같이 내려와 갯벌의 숨구멍으로 삐져나온 먹이를 정확하게 조준하여 콕콕 찍어 먹는 갈매기들의 사냥 실력이 놀랍습니다. 아이들은 아주 작은 게, 고동, 불가사리, 골뱅이, 웅덩이진 곳에 바글거리는 가느다란 물고기 떼들을 만날 때마다, 공룡을 발견한 것 마냥 소리소리 지르고 놀라 어쩔 줄을 모릅니다. 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흙을 파는 곳에 조개도 많이 나올 가능성이 크겠죠? 우리도 그 곁에 슬쩍 끼어들어 자리 잡아 봅니다.
어부의 하루
아빠는 책에서 본대로 모종삽을 비스듬히 들고 진흙을 삭삭 깎아내듯 떠내며 맛조개 구멍을 찾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한 맛조개들은 갯벌 속에 박혀 있다가 밀물이 되면 다시 쓸려나가는데, 요놈들이 통과한 구멍을 찾아 입구에 맛소금을 뿌려주면, 바닷물이 들어오는 줄 알고 고개를 쏙 내민답니다. 이때를 놓치지 말고 몸통을 꽉 잡아 끌어올리면 된다고 책에선 수십 번도 더 읽었건만 그게 말같이 돼야 말이죠. 맛조개 구멍을 찾는 일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로군요. 구멍인 줄 알고 호들갑을 떨며 소금을 마구 뿌려대면 금세 바닷물이 차서 풀어져 버리고, 옆자리에서 맛조개를 캐던 가족들이 어렵게 잡은 맛조개를 높이 치켜들고 탄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우리 같은 초보엔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에 괜스레 풀이 죽고요.
이 바다 마을에 사시는 할머니, 지나가다 철퍽 주저앉아 날렵한 솜씨로 순식간에 맛조개 네 마리를 캐내십니다. 조개 캐는 게 아니라, 밭에서 도라지 캐는 것 같습니다. 놀란 입 다물 줄 모르고 지켜보는 우리 가족에게 할머니는 맛조개가 한가득 들어 있는 들통을 보여주시면서 다 줄 테니 돈 내쇼 합니다. '아이구, 할머니, 저희 힘으로 한 개라도 캐보고 싶네요. 나중에 생각해 볼게요.'하고는 돌아앉아 부랴부랴 삽질을 합니다.
해가 제일 높이 걸릴 무렵인가요, 등도 따갑고 귓불도 화끈거리고 배도 고파오는데, 아이들은 일찌감치 호미랑 삽이랑 소금통이랑 내던져 버리고 옷이 다 젖은 채로 철퍼덩 철퍼덩 때 이른 물놀이에 여념이 없습니다. 파도에 둥둥 실려 다니는 해초 줄거리를 목에 두르고 진흙 바닥에 뒹굴다가 바닷물로 뛰어들어 감쪽같이 씻어내고, 또 뒹굴다가 씻어내고 잘도 놉니다. 빨리 조개를 잡아 국물을 내어 라면을 끓여 먹어야겠는데, 마음만 급하고 지쳐갑니다. 그때, 아빠가 모두를 부릅니다. 제대로 걸린 맛조개의 몸통을 붙잡은 아빠의 손이 '끙' 하고 맛조개를 들어내는 순간, "와! 잡았다! 맛조개 잡았어!" 하고 손뼉치고 끌어안고 펄쩍 뛰며 환호성을 지르니, 누가 보면 맛조개 한 백마리 쯤 잡은 줄 알겠습니다.
큰아이도 아빠의 도움을 빌려 맛조개 한 마리 쑥 뽑아 올리고, 작은 아이도 징그럽다고 빼면서도 형아 손 붙들고 또 한 마리 끌어올리고, 캐는 것마다 조개가 아니라 황금입니다. 이제 우리 가족은 맛조개 7마리, 비단 조개 13마리의 처음치고는 우수한(?) 성적으로 거둬낸 갯벌 수확물을 통에 담고, 당당하게 뭍으로 돌아옵니다. 마침 들어오기 시작한 바닷물이 찰랑찰랑 발목을 기분 좋게 밀어줍니다. 하루 만에 우리는 어부가 된 것 같습니다.
맛조개, 집에 가!
배가 등에 달라붙을 것처럼 고파져서 서둘러 버너에 라면 끓일 물을 데우고 있는데, 아까부터 조개 잡은 통속에 머리를 푹 박고 갸우뚱 갸우뚱거리는 작은 아이의 몸짓이 뭔가 수상합니다. 손끝으로 조개를 찔러보기도 하고, 통에 채운 바닷물을 휘휘 저어보기도 하면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군요. 처음 잡은 조개가 신기해서 그러려니 하고 "그러지 마라. 조개 스트레스 받는다."하고는 진흙 묻은 옷가지들을 헹구어내려 세면대에 갔다 오는 사이, 아이와 조개 통이 사라졌습니다. 뒤쫓아 갔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코앞까지 밀려들어 온 바닷물에 작은 아이가 조개들을 막 쏟아 부은 것입니다. 동동거리는 엄마를 바라보며, 세 살 난 우리 작은 녀석이 겸연쩍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맛조개, 집에 갔쩌! 엄마가 기다려..."
재앙
4년 뒤 겨울, 지금 우리나라는 태안반도에 유출된 기름으로 서해 전역이 오염돼, 최악의 재앙을 맞고 있습니다. 아무리 한순간의 실수라지만 대가는 참혹합니다. 뉴스에서 연일 보도되는 갯벌 참사 소식을 들으며, 7살 작은 아이는 울음을 터뜨립니다. "엄마, 어떻게? 바다가 기름기로 죽어요! 우리라도 가서 기름을 걷자! 엉?" 참담하기는 어른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커먼 기름 덩이에 뒤덮여 썩어들어가는 갯벌과 그 위에 허옇게 배를 드러내고 누운 물고기떼, 혀를 내밀고 죽은 조개들, 생계를 잃어버린 어민들의 막막함 앞에 말문이 막힙니다. 속이 썩은 갯벌만큼이나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수십 년이 걸쳐 회복될 수 있다고 하는데, 지난 몇 년 동안 간직했던 서해안 갯벌에 대한 추억이, 오늘따라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한여름 날의 꿈처럼 안타깝기만 합니다. 거대한 생명의 서식지인 갯벌이 무너지면 절대로 인간은 자유로울 수도 행복할 수도 없을 겁니다. 작은 아이 말대로 우리가 잡은 맛조개를 돌려보낼 수 있었을 때, 갯벌은 엄마의 품이고 집일 수 있었습니다. 엄마 잃은 심정으로 이 아픔을 상실감을 감당해내야겠습니다. 당장 무엇부터 시작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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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아름다워요, 비단갯벌~
예, 여름이 되니 비단갯벌이 더욱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