씽잉맘

지난밤 첫눈이 내리고, 아침엔 올가을 처음으로 큰 아이, 작은 아이 내복을 챙겨 입혀 학교, 유치원엘 보냈지요. 대문을 열자마자 밤사이 언 살얼음만큼이나 차가운 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후려치는데요, 두 아이 함박 입을 벌린 채, 오로지 눈을 보겠다고 깡총깡총 뛰어나가는 모습에, 움츠러들었던 자라목이 풀어지며 잠시 마음 한 켠에 전깃불이 들어온 듯 따뜻했더랍니다.

그러다가 다시 전깃불이 나간 듯 며칠 전에 들었던 큰아이의 씁쓸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아이들 뒷모습이 사라진 후에도, 앞마당에 풀이 죽은 거품처럼 스러져가는 첫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들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아이

초등학교 3학년인 우리 큰아이는 반에서 다정하고 상냥하기로 소문이 났답니다. 친구들이 시비를 걸거나 그 때문에 싸움이 붙어도 방글방글 웃음으로 해결하고, 그 흔한 욕설 한마디 쓰지 않으며 아무리 힘들어도 짜증 부리는 법이 없어요. 그 녀석 웃는 모습만 보면 힘들어도 기분 좋고 배가 불러서, 세상 아무 걱정 없을 듯한 해맑은 아이의 웃음 뒤에 숨어 사는, 남모를 그늘을 이 미련한 엄마는 보지 못했던 거죠.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 제일 힘들어했던 것이 또래 아이들이나 형들의 도발적인 험한 말투, 이유 없는 공격적인 태도, 욕지거리였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내 아이는 워낙 성격이 좋으니까 극복해낼 거야, 남자 아이들 세계에선 그런 문제쯤은 다반사 아닐까? 하고 막연하게 넘겨 짚어 버렸었던 저의 어리석음이 부끄럽기만 하군요. 어릴 땐 그토록 명랑하고 장난꾸러기였던 우리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말수도 적어지고 책만 읽고 공부만 하니,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부럽다고까지 했습니다.


가위파 사건

한 달 전,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그날 있었던 중대 사건(?)을 마구 흥분해서 이야기하는데요, 아이 반에는 한 명의 대장 노릇을 하는 학생과 그 아이를 따르는 부하들로 이루어진 '가위파' 라는 조직이 있었다네요. '가위파' 라니, 초등학교 3학년인 어린 아이들에게 이 무슨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며, '가위파'의 대장과 그 무리는 충동적인 용맹함(?)을 앞세워 반 아이들을 시시때때로 무릎 꿇게 하고, 지나가다 스치기만 해도 째려보고, 무리 지어 겁주고, 짓밟고, 복종을 요구하며 조직에 들 것을 강요했다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자기네들끼리 사소한 시비에 휘말려 싸우다, 한 아이가 어깨와 무릎에 멍이 들도록 집단 구타당한 것이 선생님께 적발되어 '가위파'의 대대적인 색출 작업이 벌어졌으며, 놀랍게도 반 친구들 중 세 명을 뺀 남학생 전부가 '가위파' 의 소속이라고 자백하고 매를 맞고 반성문을 썼다는데요, 그 세 친구 중 하나는 제일 비만한 아이, 하나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조금 아픈 아이, 나머지 하나는 우리 아이였답니다.

선생님께서 얼마나 노발대발하셨던지 해당 학생들의 엄마들에게 전부 알려 사과와 다짐을 받고, '가위파'의 대장과 그 일당은 학생들 앞에서 다시는 친구들을 괴롭히지 않겠으며 욕을 하지 않겠노라 백 번 약속하고 나서야 그 유명했던 '가위파'는 해체되었고 사건은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속이 후련하다며 오늘 처음으로 발을 뻗고 잘 수 있겠다고 숨을 푸욱 내쉬던 큰 아이의 얼굴에서, 그동안 어른 못지않았던 마음고생을 읽고 오히려 저는 잠을 청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보복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나 봅니다. 그 사건 이후로 선생님이 계시는 교실에서는 잠잠한 듯 보였으나, 대장이었던 아이와 그 패거리들은 기세가 더 등등해져서 선생님 눈 밖에서는 더욱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며칠 전 우리 아이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그 대장 아이와 일행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노린 상대는 우리 아이가 아니라 우리 애와 함께 가던 같은 반 친구였는데, 학교 쉬는 시간에 친구가 지나가는 대장에게 '나쁜 놈'이라고 했다는군요. 그래서 하굣길에 앙갚음을 노리고 기습 공격을 한 거더라고요. 친구는 사색이 되어 도망을 치다가 주택가 어떤 빌라 건물 안까지 숨어들었고, 대장이란 녀석, 끝까지 쫓아가서는 "나와라, 안 나오면 여기 있는 놈들이랑 다 쌩깐다!"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부하들을 시켜 건물 안에 숨어 있는 친구를 잡아내 밖으로 끌고 나와서는 시발, 개새끼, 병신이라고 하며 갖은 욕을 퍼붓고 친구 어깨를 툭툭 밀쳤다네요.

그 과정을 다 지켜본 우리 아이, 친구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에 대장에게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러느냐, 너무 심하지 않으냐고 따져 물었더니, "너는 빠져라, 밟히고 싶지 않으면 입 닥쳐라!" 하고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겁을 먹고 주춤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용기를 내어 이놈과 일대 일로 맞장을 떠볼까도 생각했더랍니다. 그러나 싸움 뒤에 있을 보복이 두려워 엄두를 못 내고  엉거주춤 대장 앞을 막아서서 끙끙대다가 엄마한테 이른다고 했더니 툴툴거리며 가버리더랍니다. 다행히 큰 싸움은 면했지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두 친구는 온 힘이 빠져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겠지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마터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끔찍한 싸움을 상상하며 치를 떨고 있는데, 우리 아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엄마, 난 왜 이렇게 약할까?" 하며 자기 친구를 결사적으로 방어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 눈물 흘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쓰리고 막막해져 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참회

저는 아이에게 무어라 말을 해주어야 할지 한동안 망설였습니다. 사건의 내용을 정리해 보니 10살 난 남자 아이들에게 강자와 강자를 따르는 무리, 그리고 약자가 나누어져 있고, 약자는 시달림을 당하며 기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강자를 아주 두려운 대상으로 생각하며 불편하게 산다는 얘긴데요, 그래서 우리 아이는 웃고 다녔던 겁니다. 일종의 처세술이었던 것이죠. 웃는 낯에 침 뱉으랴 하는 마음으로, 두려움도 분노도 절망감도 꼭꼭 숨기고 웃음이란 가면으로 대처했던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약자로 규정짓고, 어디엔가 있을 자기처럼 다정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를 하염없이 그리워하며, 아이스럽지 않은 외로운 시간을 보냈을 큰 아이의 학교생활을 생각하니, 참담했습니다. 더군다나 아이들 세계의 구조가 어른들 사는 세상의 구조와 별반 다른 것이 없어 보여, 이 모든 게 못난 어른, 엄마의 책임인 듯하여 부끄럽고 미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성질 같아서는 '너도 겁먹지 말고 그놈들과 맞붙어 원 없이 싸워봐라, 뒷일은 엄마가 책임질 테니!' 아니면 '그런 나쁜 놈들은 상대할 값어치가 없어! 깡그리 무시해라!' 막 이러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답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은 사실 강자도 아니며,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도 아닌 그냥 아이기 때문이죠. 우리 아이와 똑같은 10살 먹은 사내아이. 아직은 선생님 무서운 줄 아니까 매도 맞고 반성문도 쓰며, 엄마한테 이른다니까 꼬리를 내릴 줄도 알잖아요? 아이는 그런 겁니다.

저는 아이를 키울수록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다.'라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사는 사람이랍니다. 부모가 사는 모습과 행동이 아이에게 어떤 그림과 결과물을 투영하는지 무섭게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혹시 지금 이 순간도 부모인 어른들이 약자를 돌보지 않고 무조건 자기 이득이 되는 곳에 붙으며, 강권을 휘둘러 폭력으로 주변을 제압하려는 그런 쓰레기 같은 모습을 아이들에게 마구 마구 투영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저는 제 아이에게 말했죠. '그 애들은 무서운 애들이 아니고 무서워 보이려고 집착하는 거라고, 그리고 네가 웃음으로 상처를 위장했던 것처럼 그 애들 역시 무서운 행동 뒤에 엄청난 결핍을 감추고 있는 거라고. 그 결핍이 유감스럽지만 가장 가까이 있는 어른들에게 받은 상처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래서 욕이나 손가락질보다는 치료와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그 상처로 말미암은 결핍을 거둬내면 결국 너와 다름없는 같은 반 친구 아니냐고. 친구를 보호하려는 너의 행동은 지구 끝까지 가더라도 옳았다고, 어쩌구 저쩌구, 어쩌구 저쩌구~.'


일상으로 돌아가며...

하하, 얘기가 너무 길어졌죠? 역시 아줌마 수다는 못 말립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비롯한 모든 엄마들! 아직 아이가 엄마 무서워할 줄 알 때 잘 좀 합시다. 특히 오늘처럼 첫눈이 내린 날, 세상 모르고 마냥 좋아하는 어린 아이를 둔 엄마라면 기회가 더 많이 있는 거라 생각하고 힘들어도 분발하자구요. 아이 크면 금쪽같은 어린 시절 돌아오지 않잖아요? 아이쿠! 세탁기 다 돌아갔나 삐삐 소리 나네요.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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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씽잉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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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김승연회장식 자식 사랑, 나도 하고 싶다!

    Tracked from 수다가 좋다 2007/12/23 11:29  삭제

    아이싸움이 부모싸움이 된다. 실제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하고 반 오리엔테이션때 담임선생님 말씀중에 아이들한테 문제가 생기면 꼭 담임한테 먼저 알려달라고 부모님께서 나서지 않아주셨음 좋겠다고 했다. 그때는 왜 저런 말이 필요할까 싶었는데..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부모들간에 욕을 하며 싸우는 사태가 생기더라는 거다. 사건의 요지는 다른 반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다툼하다 여자 아이 얼굴에 상처가 난 모양인데 그 문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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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서운 일이군요. 한반에 3명을 제외한 전부가 한 조직이라니 그것도 초딩이.... 하지만 님의 글을 읽으며 정말 잘 다듬어진 글이구나, 역시 모전자전이어서 댁 자녀도 그렇게 잘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하하, 모전자전이라! 부족함이 너무 많은 엄마라서 부끄럽기만 하답니다. 격려 감사 드리고 희망을 갖겠습니다.

  2. 원래 그 나이때는, 아니 뭐 나이 들어서도 비슷하지 않나 싶긴 하지만, 전체 흐름을 따르기 마련이지요. 그리고 제 기억엔 거기엔 항상 보스급의 아이가 있었던 듯 합니다. 다만, 그 보스급의 아이가 어떤 성정을 가진 아이이냐에 따라서 문제가 될 수도 있고, 아니 될 수도 있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근데 애들 문제는 선생님이 끼어든다고 해서 쉽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거죠. 어떻게 보면 애들 사회가 더 무섭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 모습은 딱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를 생각나게 하는군요.

    •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말이죠, 거칠고 욕도 잘하는 아이들이 인기도 좋다고 하네요. 그 대장 아이, 여자애들한테도 인기가 높으며 여자애들 또한 상당히 거칠다고 합니다. 짜증도 잘 부리고, 막말도 잘 쓰고. 너나 저나 거칠게 행동하는 것이 기본인 듯 하니, 순한 아이들은 바보 취급 당하는 것이 현실이군요.

    • 여자아이들이 강한 남자에게 끌린다는건 알고 있습니다. 저 어릴적에도 그랬는걸요 뭐. 쌍욕을 하고 거친 행동을 하는게 매력적으로 보이는건 어린 나이의 아이들일수록 더 그런거 같아요. 학창시절을 돌이켜 보면, 양아치같은 애들이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았죠. 깡패에게 빠진 부잣집 따님 같은 설정... 드라마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

    • 그럴 수도 있겠군요. 어린 나이에도 부드럽게 행동할 줄 알면 좋을텐데요.